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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 비밀노트–7화] 군사분계선을 넘어...한반도 철도 정기운행의 첫걸음

양정규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6/08 [09:30]

[북한철도 비밀노트–7화] 군사분계선을 넘어...한반도 철도 정기운행의 첫걸음

양정규 객원기자 | 입력 : 2021/06/08 [09:30]

(철도경제×국토매일 공동기획)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 본 연재기사는 온라인 '국토매일'에도 게재됩니다.

 

[철도경제=양정규 객원기자/작가] 남북철도는 시험운행 행사 이후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됐다.

 

특히 2007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평양에서 치러진 2차 정상회담 영향이 컸다. 1차 회담과는 달리 2차 회담에서는 육로 방문이 합의되었다. 

 

▲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썬을 넘는 상징적 상황을 연출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콘텐츠기획과)  © 철도경제

 

▲ 평양으로 들어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환대 속에서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콘텐츠기획과)  © 철도경제

 

일정 둘째 날인 10월 3일 9시 30분 남북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회담을 가졌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10.4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 2007년 10월 2일 남북정상회담의 일원으로 참여한 당시 이철 코레일 사장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악수를 나누며 철도분야의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해냈다. (사진=한국철도공사)  © 철도경제

 

이 회담에서 성과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남북 경제협력 쪽이었는데, 그 중 철도분야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가 나왔다. 

 

당시 이철 코레일 사장은 합의문이 발표되고 여기에 철도분야 합의가 3가지나 들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동안 노력에 대한 뿌듯함과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사실 북한으로 떠나기 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빈손으로 돌아오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남북철도협력사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지만 북측의 사정과 우리의 기대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다는 것을 늘 확인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첫날 분위기는 굉장히 어색하고 딱딱했지만 다음날부터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날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부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우리측과 두 번씩 악수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 이 회담의 성과 중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가 나온 쪽은 단연 철도분야였다. 실제로 이날 합의문에는 철도분야 합의만 3가지나 들어가 있다.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 철도경제

 

이후 남과 북의 철도관련 실무진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실무접촉은 주로 개성시 자남산(子南山) 기슭에 자리한 자남산여관에서 이뤄졌다. 

 

자남산여관은 여관이라곤 하지만 4층짜리 현대식 건물에 남북 고위급 회담은 물론 수많은 민간 교류 차원의 실무협의가 이루어지던 개성 유일의 현대식 고급 호텔이었다. 

 

자남산여관 복도 끝 작은 방에는 남측대표단의 철도부문 실무자로서 자리한 코레일 남북철도사업단 전략기획팀장을 비롯하여 분야별 전문가와 통일부, 국토부, 국정원 직원이 함께 있었다. 

 

마주 앉은 북측의 철도실무자들은 직책을 밝히지 않은 채 그저 직책 없이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자며 간단히 인사했다. 

 

이날 자리에 있었던 우리측 실무자는 아마도 한쪽은 실무자, 다른 한쪽은 보안성에서 나온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남과 북의 철도실무자들은 주로 개성의 자남산여관에서 실무접촉을 가지며 일을 진행시켜나갔다.  © 철도경제

 

“어렵게 만난 김에 문 걸어 잠그고 담판을 지읍시다.”

 

남북측 대표 실무책임자들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2:2로 마주 앉아 곧바로 합의서 작성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남북측의 실무자들은 최대한 일이 되는 쪽으로 이끌어가고자 머리를 맞댔다. 

 

양측 모두 철도 운영실무자들이니만큼 가상의 계획이 아닌 실제로 열차를 운행해보고 싶은 열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내놓은 입장보다 더 욕심을 내기도 했다. 자주 만나기 어려우니 힘들게 만난 김에 더 여러 가지 일들을 협의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밀고 당기기 협상은 끝날 줄을 몰랐다. 

 

각 측의 입장을 내세우며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팽팽한 기 싸움이 반나절 이상 계속됐다.

 

“오봉에서 신의주-단동-북경 간 국제화물열차를 운행하는 것은 어떻소?”

 

북측에서 운행 중인 여객열차에 대해 화물열차를 운행해보자는 제안을 우리측에서 먼저 했다. 

 

의견을 듣자 북측 철도실무자는 무척 반기는 기색이었다. 

 

▲ 남북측의 실무자들은 가상의 계획이 아닌 실제로 열차를 운행해보고 싶은 열망이 컸고 정부가 내놓은 입장보다 더 욕심을 내기도 했다.  © 철도경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실무선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큰 부담을 느끼는 듯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은근히 우리측이 알아서 처리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우리측은 대표단으로 파견된 실무자의 결정권이 큰 반면, 북측 대표로 온 실무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 보였다.

 

“기관차 20대 정도 줄 수 있느냐?” 라는 식의 경제적 지원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말을 종종 꺼냈다. 

 

“선생, 왜 이리 고집이 세시오?”

 

곤란하지 않겠느냐라고 답하면 “대표단으로 왔으면서 그거 하나 못해주느냐”는 식으로 살살 약을 올리기도 하면서 나름의 협상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실 고집이 센 쪽은 북측이었다. 남측이 하고 싶었던 말을 북측에서 선수를 쳐 적반하장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북측 실무자들은 우리의 도움을 원하면서도 자존심이 무척 셌다. 

 

남한이 잘 사는 것 또한 자기들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북한이 성군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했는데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진심인 듯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의 북한 지원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로 많은 양보와 지원을 희망했다.

 

이처럼 남과 북은 오래 묵은 서로의 간극 만큼이나 실무협상 역시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우리 입장에서 어떻게든 북을 달래 일을 추진하고 싶은 의욕이 컸으므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북측이 경제적 도움을 원한다면 당시 남한에서 모래파동이 있었기 때문에 품질 좋기로 유명한 판문점 부근의 사천강 모래를 남한이 사들여 북측이 경제적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하는 의견도 나왔다. 

 

이 안건은 북측 운영 실무자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결국 검토 단계에서 개성공단을 위한 컨테이너 물류 운송은 컨테이너에 한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없던 일이 돼버렸다. 

 

남한에서는 철도가 여러 운송수단 중 하나일 뿐이지만 북한은 철도가 중심, 도로가 보조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철도가 전부였고 자존심이었기 때문에 철도를 내주면 전부를 내준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협상 도중 툭하면 우리측이 사용하는 용어에도 딴지를 걸었다. 무심코 사용하는 외래어에 거부감이 강했다. 

 

남측은 왜 민족성 주체성이 없이 외세에 끌려다니나며 나무랐다. 

 

그들은 실제로 김일성 배지를 김일성 상장이라고 하고 ‘패색구간’을 ‘길차지’, ‘추진운전’은 ‘밀기운전’, ‘입환작업’은 ‘차갈이작업’ 등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달라도 너무 다른 규정상의 용어 때문에 합의서 역시 각각 남한 용어로 작성된 것 1개, 북한 용어로 작성된 것 1개 이렇게 총 2개를 작성해야 했다. 

 

▲ 평양과 베이징을 잇는 국경열차의 모습. 대부분 국경역에서는 서로 합의하여 하나의 열차번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 열차 번호 관련해서도 기싸움이 치열했다. (사진=한국철도공사)  © 철도경제

 

또한 열차번호를 둘러싼 남과 북의 기싸움도 대단했다. 

 

열차번호를 짝수로 할 것인지 홀수로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맞선 것이다. 

 

원칙적으로 열차번호는 서울기점으로 내려가는 것은 홀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은 짝수로 열차번호를 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래서 남측 실무자들은 북측으로 가는 것을 홀수로, 북측에서 남측으로 가는 것을 짝수로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북측은 곧바로 난색을 표했다. 회담이 결렬될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결국 남측에서 출발할 경우 홀수로 출발하다가 분계선을 지나면 짝수로 바꾸자고 결론을 냈다. 

 

도라산에서 판문역으로 갈 때는 S2007, 다시 판문역에서 도라산역으로 갈때는 S2008로 번호판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국경역에서는 서로 합의하여 하나의 열차번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 서로의 뜻을 굽히지 않은 결과 열차에 홀수 짝수의 두 개의 번호판을 갈아끼워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다음날 실무 점검팀은 북한의 개성역, 판문역, 손하역, 금강산역 등의 철도역을 점검했다. 

 

실제로 승객이 열차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북측이 미리 민간인 출입을 통제한 채 점검팀만을 들여보내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당한 채 점검에만 집중했다. 

 

이후 남과 북은 문산~봉동간 화물열차를 매일 1회 운행하고, 기관차 1대, 화차 10대, 차장차 1대(기관차 포함 총12량)를 기본으로 하되, 화물수송량 확대에 따라 횟수를 늘려나가기로 했다.

 

▲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노선인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화물 열차 (사진=한국철도공사)  © 철도경제

 

문산-봉동(개성) 구간에서 철도로 화물수송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분단 이후 완전히 닫혀있던 휴전선의 철로가 뚫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개성-신의주 구간 철도를 공동으로 이용하고 개보수를 추진한다는 것은 우리 철도가 북한 철도를 통해 중국과 시베리아 철도 등 대륙철도와 연결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통근열차와 금강산 관광열차 운행 등에 대한 합의는 아직 이끌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큰 물꼬는 트인 셈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철도의 물줄기가 막힘 없이 흐르게 되길 바라며 남과 북 양측의 철도실무자들은 2007년 12월 11일에 있을 문산-봉동간 화물열차 운행을 위해 힘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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