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승인 10년, 안전성 향상에서 산업 혁신으로의 전환 필요
SIL 기반 품질 향상은 이뤘지만 기술 발전 속도와 규정 간 격차는 여전
AI·소프트웨어 시대에 맞는 신기술 평가 체계 구축이 핵심 과제
규제를 넘어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산업 플랫폼으로의 진화 요구
형식승인 10년, 이제 규제를 넘어 '혁신 생태계'로
철도 신호 시스템은 단 한 번의 오류도 허용할 수 없는 대표적 고신뢰 인프라다. 이러한 특성상 기술의 안전성·신뢰성 확보는 산업 전반을 떠받치는 핵심 기반이며, 체계적 검증 제도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2014년 개정된 '철도안전법'을 통해 도입된 '철도신호용품 형식승인 제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신호장치·계전보호장치·차측경보장치 등 주요 품목의 안전성과 성능을 사전에 검증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통합적 안전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지난 10년 동안 형식승인 제도는 ① 안전무결성(SIL) 기반의 체계 확립, ② 제품 신뢰도 향상, ③ 국산 신호 산업의 기술 수준 고도화라는 목표를 충실히 달성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규정 중심의 절차가 기술혁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문제제기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제 형식승인을 단순한 '허가 절차'에서 벗어나, 산업 혁신을 촉진하는 플랫폼적 제도로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지난 10년의 성과 - 안전·품질·국산화의 체립
형식승인 제도 도입 이후, 국내 신호용품의 안전성과 품질 수준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제품의 SIL 인증, 기능안전 검증, 설계 검토 등의 절차가 표준화되면서 제조사의 품질 역량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확보되었고, 기술 문서의 완성도 또한 대폭 개선되었다. 특히 주요 신호장치의 국가인증 체계를 갖추면서 국산 장비의 국제 경쟁력 확보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이전에는 업체별로 기술 문서 형식과 품질 수준이 지나치게 달랐지만, 형식승인을 통해 일관된 품질 기준을 갖추게 되었고 실무자의 기술 숙련도 또한 동반 향상되었다. 또한 국제 표준(ISO 기반 위험 분석, 설계 검증, 소프트웨어 품질관리 등)을 국내 제도에 접목하면서 한국형 기술 인증 체계가 본격적인 선진화 단계에 진입한 점도 중요한 성과다.
제도 운영의 한계 - 기술혁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규정의 문제
성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술변화 속도와 규정 간 비대칭이 문제로 지적된다.
1) 절차 중복과 높은 인증 비용
형식승인·안전성 검증·운영 승인 등 유사한 절차가 중복되며 동일 제품에 대해 여러 기관에서 비슷한 시험을 반복 수행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는 시간·비용 부담으로 직결되어 기업의 신기술 개발 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특히 이미 SIL 인증을 획득한 제품임에도 국내 형식승인을 위해 유사 시험을 재수행하는 경우가 있어 제도 일관성 측면에서 개선 요구가 높다.
2) 하드웨어 중심의 평가 규정
현재 형식승인 체계는 도입 초기 기술구조를 반영하여 ‘하드웨어 중심’의 시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 철도 신호기술은 AI 기반 장애 예측, IoT 기반 실시간 감시, 디지털 트윈 분석 등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정형화된 시험 방식만으로는 이러한 기술을 충분히 평가하기 어렵고, 경우에 따라 '신기술 도입 지연'이라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3) 규정 개정 속도의 한계
AI·디지털 기반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규정 개정은 상대적으로 느리다. 따라서 기술 발전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해 현장의 적용이 지연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형식승인이 '안전을 담보하는 제도'에서 '기술혁신의 병목'처럼 비치는 사례도 발생한다.
향후 10년을 위한 전략 -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산업 플랫폼으로의 전환
형식승인이 앞으로의 10년 동안 기술혁신과 산업 경쟁력을 이끄는 플랫폼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변화가 필요하다.
1) 인증 절차의 통합·일원화
유사 절차의 반복을 해소하기 위해 철도 인증 통합 포털(가칭) 구축이 필요하다.
안전성 검증, 운영 승인, 형식승인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여 최초 승인 결과가 후속 인증에서도 활용되도록 하는 방향이다. 또한 제품 변경·개량 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신속히 반영될 수 있는 유연한 변경관리(Change Control) 체계가 필수적이다.
2) 신기술 맞춤형 인증체계 도입
기존 고정형 시험만으로는 AI·소프트웨어 기반 기술을 충분히 평가하기 어렵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기술특성 기반 인증 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
⋅모델 기반 시험(Model-Based Testing)
⋅디지털 트윈 기반 성능 검증
⋅학습 데이터 신뢰성 평가
⋅자동화된 시험 체계
⋅단계적·확장형 인증 방식
이러한 체계가 마련되어야 신기술이 제도권 안에서 완전하게 평가될 수 있다.
3) 국제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 확대
국가 간 상호인정이 확보된다면 형식승인 결과만으로도 현장 적용이 가능해지고, 이는 산업 효율성과 국제 경쟁력 제고로 이어질 것이다.
4) 주기적 피드백 기반의 '살아 있는 제도'
형식승인은 한 번의 승인으로 끝나는 절차가 아니라, 실제 운영 중 수집되는 성능 데이터·오류 기록·유지보수 결과 등을 기반으로 지속 개선되는 순환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규제에서 산업 혁신 플랫폼으로의 대전환
지난 10년간 형식승인 제도는 국내 철도 안전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10년은 규제 중심에서 산업 플랫폼 중심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형식승인은 더 이상 단순한 사전 검증 제도가 아니라, 기술혁신을 촉진하고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는 전략적 도구가 되어야 한다.
신기술의 현장 적용을 지연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신뢰성과 혁신을 동시에 보장하는 제도적 기반이 갖춰질 때 한국 철도 산업은 진정한 의미의 자립성과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선준 한양대학교 교수·본지 편집위원

